역사적인 기원, 명품으로 이어지다

[연재] 와인-엉뚱한 호기심 : 섬유패션 vs 와인 (3편 : 근세~현재)

TIN뉴스 | 기사입력 2022/10/04 [15:30]

▲ 정기훈 덕성인코 대표  © TIN뉴스

 

1453년 동로마제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비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문물교류의 육로 즉 실크로드는 이슬람국가의 완벽한 통제와 관리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서유럽국가들의 바닷길을 통한 아시아로의 새로운 교역로 개척을 절실하게 하는 동인이 된 것이다.

 

드디어 1492년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우여곡절 끝에 에스파냐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서양 인접 서유럽 국가들은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인류역사와 세계지도가 바뀌게 되는 중대한 시점이 되는 사건이다.

 

유럽역사학자는 중세의 종말을 1453년으로 미국에서는 1492년으로 구분하는 역사인식의 차이가 벌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의식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유럽 중심으로 탐구하게 되어, 유럽식 역사해석을 따르도록 하겠다.

 

1492년 이후, 16세기 서유럽은 극심한 종교내홍을 국지적으로 겪게 된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왕권강화와 복잡하게 얽히며 수많은 개혁과 칙령이 발표되고 심지어는 전쟁으로까지 발발하게 된다. 100년 전쟁을 치르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영국과 프랑스는 종교갈등을 빠르게 수습하게 되며 왕정중심 국가체계를 공고히 하게 된다. 

 

반면에 신성로마제국 소속의 여러 봉건국가들은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왕정 리더십을 만들어 내지 못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러 현재의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국가 선언을 하게 된다. 

 

결국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는 통일법을 반포(1559)하고 프랑스는 앙리4세의 낭트칙령(1598)으로 종교갈등을 마무리하면서 왕실의 강력한 리더십을 세운다. 또 17세기 서유럽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이 왕권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면서 절대왕정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다. 

 

이때부터 영국은 바닷길을 따라 아메리카대륙을 향한 대항해의 여정을 떠나게 되고, 프랑스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형 사회 문화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부르봉 왕가를 개창한 앙리4세와 왕권 절대주의를 표방한 루이13세를 이어 태양왕을 자처한 루이14세 (1643-1713)에 이르면서 프랑스의 궁정 문화는 바로크 문화사조의 극치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프랑스 문화유산의 극치로 평가받는 베르사유 궁전이 완공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당시의 강력한 왕권의 지배력과 경제력을 유추하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장식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루이1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5세에 왕위에 오른 루이14세는 어머니의 섭정을 거쳐 23세에 친정이 시작되는 시기, 재무장관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 ~ 1683)의 중상주의에 기반한 국부증진을 위한 다양한 경제정책을 이끌어 가게 된다. 

 

특히 왕립 제조공장(고블랭 제작소)을 창설하고 공업 보호 육성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명품산업의 기틀로 평가받게 된다. 

 

▲ 파리 고블랭제작소를 방문한 루이14세와 콜베르  © TIN뉴스

 

위 사진은 루이14세와 콜베르가 고블랭 제작소를 방문한 당시의 그림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봄 직한 다양한 쟈카드 카펫과 화려한 가구, 세공품 등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필자가 처음 베르사유를 방문하고 그림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한 크기의 쟈카드 카페트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방마다 가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 사진이다. 

 

면/마/울 섬유 등을 실상태로 다양한 색상으로 염색을 하는 기술이나, 이를 수십 미터 크기의 직물로 엮어 실사그림 수준의 섬세한 표현을 해내는 것으로 기술을 넘어 예술에 가까운 장인정신을 확인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명품(Luxe 프)급의 카테고리로 정립된 브랜드가 등장하는 등 당시의 장인정신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섬유패션 명가의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와인산업의 명품화 과정 또한 다르지 않다. 100년 전쟁으로 보르도 지방을 빼앗긴 영국 왕실은 보르도 와인을 무역거래로 수입을 하게 되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과도한 수입관세로 프랑스 와인 수입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를 틈타 스페인 포르투갈 와인 수입이 급증하게 된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중간의 무역전쟁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기시감이 든다.

 

영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힌 보르도는 프랑스 왕실에 납품하기 위해 부단한 품질 개선과 향상에 노력했을 것이다. 이를 전후해서 수준 낮은 화이트와인을 생산하던 보르도 북쪽에 위치한 꼬냑 지방에서는 영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와인산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이를 증류해서 팔아보자는 네델란드 상인의 제안과 당시 전쟁으로 지친 시민들과 별다른 약이 없던 흑사병(패스트)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약용대용으로 와인을 끓여서 증류주를 만들게 된다. 끓인와인(Vin Brule프, Brandewijn네)이란 뜻에서 유래한 브랜디(Brandy)가 탄생하고 그 원조 지방이 꼬냑이라 고유명사화 되었다. 와인에서 파생한 새로운 명품 등장의 서막인 것이다.

 

▲ 다양한 꼬냑 브랜드  © TIN뉴스

 

1630년 파리 북동쪽 상파뉴지역 오빌레 마을의 성베드로 수도원의 양조담당 이였던 동 페리뇽 수도사는 우연한 기회로 추운 겨울 동안 지하와인창고에서 보관하던 와인병이 따뜻한 봄이 되며 일어난 2차발효로 터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탄산가스의 청량감과 와인의 조화를 최초로 발견하고 이를 레드 화이트 와인에 이은 새로운 발명품인 제3의 와인으로 탄생시킨다. 샴페인이라는 영어식 발음으로 널리 알려진 상파뉴의 지방의 새로운 명품이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꼬냑과 상파뉴, 더불어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고급 와인은 부르봉 왕실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왕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와인과 관련된 과시와 자랑 경쟁의 에피소드가 스토리로 만들어지면서 명품 와인의 역사적 배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 동 페리뇽 수도사와 이를 브랜드화한 샴페인  © TIN뉴스

 

루이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는 37세까지 자녀가 없었다. 불임으로 노심초사하던 왕비에게 부르고뉴 수도회의 마르게리트 수녀가 왕비의 회임을 예언하고 그해에 기적적으로 임신을 하여 얻은 아들이 루이14세였다. 

 

왕비는 이를 치하하고자 수도회에 포도원을 선사하는데, 그 포도밭의 이름을 아기 예수의 포도밭이라는 의미의 빙 드 랑방 제쥐(Vigne de L'Enfant Jesus)로 개명하여 루이14세의 탄생을 기리게 된다.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부샤르 페레 에 피스 네고시앙이 소유하면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루이14세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여전히 크리스마스에 이 와인을 즐기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으며, 부르고뉴 최대 네고시앙(와인상)인 부샤르 페레 에 피스는 창업자이자 섬유 직물사업을 하던 미셀 부샤르가 1731년에 창업한 와인 전문회사이다. 당시 왕실의 역사와 섬유산업, 와인 비즈니스가 자연스럽게 엮여지는 대표적인 스토리다. 

 

▲ 빙 드 랑방 제쥐 와인  © TIN뉴스

 

현재까지도 최고가의 와인의 자리를 한번도 내어 준 적이 없는 최고명품와인 “로마네-콩티”는 원래는 카롤루스 대제때부터 유래한 클리니 수도원 소속의 와이너리(양조장)로 루이15세 시절에는 크루넴부르 가문 소유였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는 루이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와 정실부인의 아들 콩티 왕자라고 불리는 루이 프랑수아와의 갈등 속에서 쟁탈 경쟁의 정점에 서게 된다. 

 

결국 퐁파두르의 모함으로 베르사유를 떠나게 된 콩티 왕자는 로마네를 손에 넣게 되고, 이후로 로마네-콩티로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 오고 있다. 콩티왕자에게 로마네를 빼앗긴 퐁파두르는 샴페인에 매료되어 부르고뉴 와인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로마네-콩티는 공화정에 의해 몰수되어 수차례 소유권이 바뀌고, 19세기말 필록세라(병충해)라는 대재앙을 버텨냈던 피노누아 고령수종도 1946년 전면 교체가 되어 현재는 당시와는 다른 와인이 양조되고 있으나 최고명품의 역사와 스토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 2018년 10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최고가로 판매된 1945년 로마네-콩티 2병(49만달러+55만달러) © TIN뉴스

 

최근 와인경매시장에서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와인도 수종 전면교체 전해인 1945년 빈티지 로마네-콩티로 2018년 10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병이 55만달러(7억여원)에 낙찰되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와인이면서 마셔본 사람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와인이기에 이름만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한해에 3천여 병 정도 출시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0병 정도 배급(?)되는 걸로 알고 있다. 실제 로마네-콩티는 한병만 별도로 판매하지 않고, 패밀리와인 5종과 함께 6병 세트로 중간상이 구매해 소비자에게 낱병으로 재판매한다. 그 가격이 한 병에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금값에 육박하는 음료를 입에 담아 위장으로 흘릴 용기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보르도에도 부르봉 왕가를 개척한 앙리4세와의 전설적인 스토리가 전해진다. 낭트칙령으로 신구교의 갈등을 봉합하고 민생 개선에 매진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앙리4세가 어느 날 쌍떼밀리옹의 한 와이너리에서 하루를 머물고 하얀 말을 타고 파리로 떠났는데 그 곳이 지금까지 명품와인으로 이어지고 있는 샤또 슈발블랑(백마)이다. 그 연유로 이름까지 바꿀 정도로 당시 앙리4세의 방문이 꽤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1855년 그랑크루 평가에서 제외되었던 쌍떼밀리옹 지역은 1955년에 등급제도가 확정되면서 샤또 오존과 함께 A등급에 선정된다. 2012년에는 안젤루스와 샤또 파비가 추가로 A등급을 받으며 4대 명품 와인으로 쌍떼밀리옹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와인이 되었다.

 

▲ 보르도지방 쌍떼밀링옹의 명품와인  © TIN뉴스

 

그리고 보르도 메독지방의 그랑크루 5대 명품 와인(샤또 라뚜르, 샤또 라피드 로스칠드, 샤또 오브리옹, 샤또 마고, 샤또 무똥 로스칠드)과 스위트 명품와인으로 유명한 소테른 지방의 샤또 뒤켐 도 루이 16세의 사치와 향락의 극치를 이루는 시기에 왕가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100년 전쟁으로 영국의 클라레(Claret 보르도 와인의 영국식 표현)에서 프랑스로 되돌아온 보르도 와인은 부르봉 왕가의 관심과 후원으로 단시간내에 명품 와인산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 보르도 샤또 디켐과 그랑크루 1등급 5대 와인  © TIN뉴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의 역사는 없듯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부르봉 왕가의 치세는 1789년 서양 역사의 중대 변곡점 되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3년뒤 단두대에 오른 루이16세와 사치의 여왕 마리 앙뚜아네트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격동의 역사, 혁명정부 → 제1공화정 → 나폴레옹 → 부르봉 왕가의 복조에 이어 제2공화정의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3세가 1851년 쿠테타로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강압정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지친 민심을 달래고자 경제적인 성장과 치적활동에 치중하게 된다. 

 

4년후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Expo sition)를 프랑스의 문화 기술적인 우월성을 자랑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나폴레옹3세는 와인(꼬냑, 샴페인)과 섬유패션을 주력 아이템으로 선정하여 전시하도록 지시한다. 이들 제품이 명품이라는 이미지로 세계적인 브랜드로 알려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와인의 경우 보르도 지방(메독 위주)에 당시 5천여 개가 넘는 와인브랜드 중에 2백 여개 정도만 고급와인으로 선정하는 1~5 등급체계를 급조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까지도 그 등급에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몇 개 브랜드는 등락이 있으나, 지면상 추후 연재에 설명하겠다.) 

 

지금도 프랑스 보르도 와인 레이블에 1855 숫자가 쓰여진 와인은 등급을 인정받은 상위 5%이내의 명품와인으로 인식되고 실제 고가로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꼬냑과 샴페인에는 전시에 참여했던 업자에게 임페리얼이나 나폴레옹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이후 유독 술이름에 나폴레옹과 임페리얼 등이 상표와 에디션 이름으로 많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섬유 패션의 경우 당시 브랜드나 디자이너 개념이 없던 시기였는데 영국 태생이지만 파리 기성복상점에서 일하던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rick Worth)가 고급 맞춤복이라는 의미의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의 장르를 새롭게 창시하게 된다. 

 

사실 그는 나폴레옹 3세 왕비의 전속 디자이너로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주력 디자이너로 출품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고급 패션을 알리고 이를 명품 브랜드화 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 찰스 프레드릭 워스 - 오트 퀴투르의 아버지  © TIN뉴스

 

더욱이 만국박람회 이후 왕족과 귀족 사회에 최고급 패션을 선도하는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된 워스는 1858년 당시 파리 최고의 의상점이었던 가쥬랭&오피게즈에서 함께 활동했던 오토 보베르(Otto Bobergh)와 워스&보베르(Worth & Bobergh)의 이름으로 여성복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패션산업에서 최초로 의상에 그의 이름이 상표로 붙여진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 찰스 프레드릭 워스의 의상에 붙여진 최초의 브랜드 레이블  © TIN뉴스

 

이후 워스는 1년에 계절별로 4번씩의 패션쇼를 개최하여, 그의 예술적 감상의 작품 같은 의상들을 선보였는데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에까지 유명세가 확산되면서 현재의 명품 패션 브랜드의 원조가 되었다. 예술작품과 상업제품의 현실적 선망의 대상을 창조한 것이다.

 

1851년 수정궁으로 유명한 런던 만국박람회를 시작으로 기술과 상품의 세계화가 시작이 되었다. 다음 박람회인 1855년 파리 박람회는 나폴레옹3세의 야심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현재까지 엑스포-EXPO(영어가 아닌 불어 Exposition의 약자)라는 이름으로 많은 나라가 개최를 염원하는 최고의 국제행사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대전과 여수에서 엑스포를 개최한 적이 있으나, 이는 인정행사로 공식개최와는 다르게 참여국가와 규모도 축소되어 국내행사 성격이 강했다. 그런 점에서 동/하계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개최하고, K-컬처로 한껏 달아오른 한국의 위상을 보다 굳건히 하기 위해 2030년 정식 부산EXPO 유치에 국민적 의지를 모아야 한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프랑스 와인과 패션이 명품브랜드화 되면서 세계로 도약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다음호부터는 20세기 중반까지 급성장한 패션과 와인의 명품브랜드 스토리 그리고 이들 브랜드를 둘러싼 프랑스 이태리 명가의 성장과 자존심 대결, 또 어디선가 들어 봄 직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지루한 역사이야기가 아닌 보다 실감나는 스토리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기훈 ㈜덕성인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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