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머네스크(Beamon-esque)—한계를 넘는 찰나의 순간, 한국 섬유패션 다시 뛰자

[창간 28주년 발행인 칼럼] “섬유패션산업 부활 특별법 제정되어야”

TIN뉴스 | 기사입력 2025/10/01 [16:34]

▲ 발행인 장석모©TIN뉴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산업의 명운을 가르는 것은 운이 아니라 의지와 준비, 그리고 그 의지를 제도와 공동체가 어떻게 받쳐 주느냐에 달려 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밥 비먼(Robert ‘Bob’ Beamon)은 멀리뛰기 결승 1차 도전에서 8m90㎝를 날아올랐다. 계측기가 기록을 하지 못해 수동으로 측정해야 했던, 상상 너머의 순간. 

 

그때부터 ‘비머네스크(Beamon-esque)’라는 말은 더는 깰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을 단숨에 넘어서는 기적의 별칭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또 한 번 우리에게 말한다. 불가능은 정지된 명사가 아니라, 준비하는 자 앞에서 서서히 무너지는 동사라고.

 

1991년 도쿄 세계선수권 대회. 

10년 무패의 제왕 칼 루이스(Carl Lewis)가 밥 비먼의 8m90㎝의 기록을 갱신하며, 장내를 압도했지만 강풍 보조로 기록은 공인되지 못했다. 모두가 칼 루이스의 승리를 예감하던 그때, 마이크 파월(Michael Powell)이 마지막 도전에서 8m95㎝를 기록하며, 23년간 깨지지 않던 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포기하지 않은 준비, 기회를 알아보는 눈, 그리고 끝까지 달려드는 용기. 이 세 가지가 불가능의 껍질을 깼다.

 

한국 섬유패션산업의 여정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값싼 대량 생산의 굴레에서 벗어나 공정기술, 소재혁신, 장치산업의 숙련으로 세계와 어깨를 겨뤄 왔다. 지금도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우리의 존재감은 선명하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망의 요동, 에너지·원자재 비용 급등, 환경규제 강화, 인구와 지역의 불균형, 숙련 인력의 이탈은 산업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공장은 불을 끄고, 장인은 현장을 떠나며, 공급망 생태계는 소멸되어 갔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실패의 서사를 확대·재생산하는 대신, 다시 도약하는 서사를 준비하는 것. 즉 비머네스크의 순간을 산업 전체의 도약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도약은 선언만으로 오지 않는다. 

의지는 제도로, 제도는 실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섬유패션산업 부활 특별법’을 요구한다. 산업의 체력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성장 축을 열기 위해, 다음 다섯 개의 축을 국가적 미션으로 엮어야 한다.

 

첫째, 친환경·고효율 공정으로의 대전환

염색·가공의 물·에너지 발자국을 줄이는 설비투자, 저욕비·염색·디지털 프린팅 등 신공정의 상용화, 재생·바이오 기반 소재의 파일럿에서 양산까지 하나로 묶어 지원해야 한다. 환경과 경쟁력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동시달성의 목표다.

 

둘째, 디지털 제조와 데이터 인프라의 표준화

원사→직물→염색→봉제 전 공정의 생산·품질 데이터를 연결하면 AI 최적화가 가능해진다. 중소 공장도 바로 얹을 수 있는 레퍼런스 아키텍처, 공용 데이터 레이크, 상호운용 표준을 국가가 깔아줘야 ‘한 공장의 혁신’이 ‘산업군의 혁신’이 된다.

 

셋째, 수요 연계형 고부가 밸류체인 재편

K-패션, 스포츠·메디컬·모빌리티 등 수요산업과 ‘소재-부품-완제품’ 컨소시엄을 제도화하고, 조달·수출금융·세제 인센티브를 성과기반으로 묶어야 한다. 무엇보다 K-패션은 결국 ‘Made in Korea’가 되어야 한다. 즉 원사부터 의류제조까지 묶어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넷째, 인력 전환과 지역 앵커클러스터 재건

사람이 머물고 배우고 성장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대구 염색 산업은 이 전환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탄소·수질 저감 로드맵, 디지털 트윈 기반 공정 최적화, 공동 폐수·에너지 설비의 고도화로 ‘글로벌 레퍼런스 클러스터’의 깃발을 세우자. 아울러 신규 젊은 기술인력을 유입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다섯째, 국방 섬유의 전략적 국산화

전투복·방호복·야전장비는 기술의 집합체다. 난연·내열·내절단 성능, 경량·내구, 항균·쾌적성은 기본이고, 멀티스펙트럼 위장(가시광선·근적외선·열상 대응), 적외선(열) 신호 저감 염색·가공, 방검·방탄용 고강력 섬유(아라미드, 초고분자량 PE 등)와 세라믹/복합소재 라미네이션, 센서를 품은 스마트 텍스타일까지 요구된다.

 

무엇보다 이 5개 축의 핵심은 소재-원단-염색ㆍ가공-완제품의 ‘국내 일관 체계 구축’이다.

- ①원사(방사·방적)→직조/편성→염색·후가공→봉제·라미네이션을 하나의 보급 표준과 성능평가 체계로 묶어, 조달 리드타임과 외산 의존을 동시에 낮춰야 한다.

 

- ②국방 규격과의 적합성을 높이기 위해 방위사업청·국방과학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성능지표를 최신화하고, 야전 피드백을 반영하는 신속한 시범 규정 트랙을 상시화해야 한다.

 

- ③대구의 염색·가공 역량은 후가공에서 세계적 레퍼런스를 만들 잠재력이 크다. 시험·평가 인프라와 품질 데이터베이스를 개방형으로 구축하면, 민·군 겸용(duality) 제품이 연속적으로 탄생한다.

 

- ④마지막으로 규격과 상호인증에 대응하는 표준화를 서둘러 수출 루트를 열어야 한다. 국방은 안보이면서, 동시에 고부가·고신뢰 시장이다. 이 축이 확립되면 민수 기능성 섬유 전반의 기술수준도 동반 상승한다.

 

산업은 결코 혼자 달리지 않는다. 

기업의 땀, 연구현장의 호기심, 학교의 교육, 정부의 제도, 금융의 용기, 지역사회의 연대가 동시에 박자를 맞출 때 비로소 세상은 변화한다. ▲의지를 낭비하지 않게 해주는 제도적 안전망 ▲도전을 지체시키지 않는 절차 ▲실패를 학습으로 전환하는 문화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비머네스크의 순간은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예정된 결과’가 된다.

 

창간 28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섬유패션산업의 어제를 경이로움으로만 바라보지 않겠다. 내일의 기록을 쓰는 주어로서, 다시 출발선에 선다. 공장의 불빛이 더 오래, 더 친환경적으로 빛나도록. 장인의 손끝이 데이터와 만나 더 정밀해지도록. 산과 강, 하늘이 더 맑아지고, 세계의 시장과 야전의 현장에서 한국 섬유가 다시 사랑받도록 해야 한다.

 

기록은 준비된 자에게만 무너진다. 지금, 한국 섬유가 다시 한 번 부활의 재도약을 준비하자. 우리의 의지를 제도로, 제도를 실행으로 바꾸자. 그리고 두려움 대신 설렘으로 도약하자. 그 순간, ‘비머네스크’는 한 선수의 별명이 아니라, 한국 섬유패션산업의 새로운 이름이 될 것이다.

 

TIN뉴스 발행인 장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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