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롱패딩의 나라, K-패션의 다음 질문

[칼럼] TIN뉴스 편집국 김상현 취재팀장

TIN뉴스 | 기사입력 2026/03/12 [16:14]

▲ 김밥의 김을 떠올리게 한다며 ‘김밥 패딩’이라 불리는 검은 롱패딩. 거리에서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이어지는 풍경을 본 외국인들은 “단체복 같다”, “도플갱어 같다”며 신기해한다.  © TIN뉴스

 

며칠 전 지인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평소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나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지인 역시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브랜드는 달랐지만 멀리서 보면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패딩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이야기를 나눈 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휴대폰을 넣으려던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안쪽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옷이 서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인 역시 내 연락을 받고서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뒤 다시 만나 패딩을 돌려받았지만, 그 일을 겪으며 새삼 느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보던 검은 롱패딩들이 얼마나 비슷한지 말이다.

 

비슷한 경험은 식당에서도 종종 있다. 신발장이 없는 식당에서 입구에 벗어둔 구두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발을 찾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는 장면. 직장인들이 대부분 검은색 구두를 신다 보니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 요즘 SNS에는 같은 브랜드의 검은 롱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모여 있는 사진이나, 지하철 좌석 양쪽에 검은 패딩 승객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세차장 롤러에 비유한 밈이 종종 올라온다.  © TIN뉴스

 

요즘 SNS에는 같은 브랜드의 검은 롱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모여 있는 사진이나, 지하철 좌석 양쪽에 검은 패딩 승객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세차장 롤러에 비유한 밈이 종종 올라온다.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지만 동시에 한국 패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김밥의 김을 떠올리게 한다며 ‘김밥 패딩’이라 불리는 검은 롱패딩. 거리에서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이어지는 풍경을 본 외국인들은 “단체복 같다”, “도플갱어 같다”며 신기해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 브랜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는 1만 개가 넘는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사이트에서 남성 검은 반팔 티셔츠를 검색하면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 수가 수만 개에 달한다.  © TIN뉴스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는 1만 개가 넘는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사이트에서 ‘남성 검은 롱패딩’을 검색하면 수백 개의 제품이 나오고 ‘남성 검은 반팔 티셔츠’는 수만 개에 달한다.

 

브랜드와 제품은 넘쳐난다. 그런데 거리의 옷차림은 오히려 점점 더 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문제는 양이 아니라 스타일의 다양성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기억하는 패션은 브랜드의 숫자가 아니라 거리에서 보이는 자유로운 스타일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튜버인 Mark Manson이 한국을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영상을 공개해 화제가 됐다. 그는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위계적 문화 속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자기 표현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의 직장 문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경쟁은 받아들이면서 개인주의와 자기 표현은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

 

패션 역시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튀지 않는 것이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이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는 옷차림도 비슷해지기 쉽다. 기능성과 실용성을 앞세운 ‘워크웨어적 패션’이 일상복처럼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해외 패션계가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서울 동묘 시장은 요즘 독특한 스타일의 원천으로 주목받고 있다. 등산복과 정장, 스포츠웨어와 클래식 아이템을 자유롭게 섞어 입는 시니어들의 스타일 때문이다.

 

▲ 불가리아 출신 디자이너 Kiko Kostadinov가 SNS에 올린 동묘에서 본 스트릿 패션과 영감을 받아 선보인 패션쇼  © TIN뉴스

 

불가리아 출신 디자이너 Kiko Kostadinov 역시 동묘에서 본 어르신들의 스트리트 패션을 SNS에 올리며 “스포티함과 캐주얼의 경계를 넘나드는 최고의 거리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서 이른바 ‘아재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동묘의 패션은 의도적으로 꾸민 스타일이 아니다.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조합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자연스러운 믹스매치가 해외에서는 신선한 패션 코드로 읽힌다.

 

▲ 낚시 조끼를 연상시키는 PRADA 2024 S/S 시즌 컬렉션과 꽃무늬 할머니 몸빼 고무줄바지가 연상되는 CHLOÉ Cinched Ankle Pant  © TIN뉴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꽃무늬 원피스나 누빔 조끼, 스카프 같은 할머니 세대의 아이템이 빈티지 감성으로 재해석되는 현상도 비슷한 흐름이다.

 

최근 정부와 산업계는 ‘K-패션’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정책과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 구글에서 ‘K-fashion’을 검색하면 아이돌 스타일링이나 패션 브랜드 런웨이 이미지가 먼저 등장한다.  © TIN뉴스

 

과연 무엇이 K-패션일까.

구글에서 ‘K-fashion’을 검색하면 아이돌 스타일링이나 패션 브랜드 런웨이 이미지가 먼저 등장한다. 그러나 거리의 풍경 역시 그 사회의 패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해외에서 온 관광객에게 K-패션을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쇼핑몰이나 패션 거리를 안내하기보다 동묘 시장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더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비슷한 옷차림의 무채색 도시보다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거리.

어쩌면 K-패션의 다음 단계는 런웨이가 아니라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김상현 취재팀장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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