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에스콰이아 창업주 

이인표(李寅杓)  

1922~2002

 

▲ 에스콰이아 창업주 이인표(李寅杓)   © TIN뉴스

1961년 150만환의 자본금에 12명의 직원에서 출발해 제화 뿐 만 아니라 의류 및 액세서리까지 생산하는 토털패션기업으로 성장한 에스콰이아의 창업주 이인표(李寅杓)는 “가볍고, 튼튼하고, 모양 좋고, 편안한 구두를 만드는 일” 오로지 최고의 구두를 생산하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40년을 제화산업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인표는 중림동에서 여관을 운영한 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893년 완공된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 중리동성당(약현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가명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엄격하고 종교적인 성스러운 분위기와 세상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의 정신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된다. 

 

훗날 모진 세월 속에서 풍운아처럼 살면서도 기업가로서 스스로의 가치관과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당시 카톨릭학교를 다니며 익힌 도덕률 덕분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보통학교에 이어 경성상고실무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보다는 영화나 연극 같은 예술분야에 더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동양극장에서 운영하던 청춘좌극단에 연출연구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폐결핵에 걸리면서 7년 동안의 극단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다행히 미군정시절 극단경력을 인정받아 미군공보처에서 운영하던 이동연극반에서 4년 넘게 근무하면서 연극연출가의 꿈을 이어가지만 6.25가 터지면서 그마저도 접게 된다. 

 

이때 부산행 피난길에 오르면서 예술가에서 사업가라는 새로운 길에 운명처럼 접어들게 된다. 

 

31살에 부산 국제시장에서 양품브로커(중개상인)로 사업에 첫 발을 내딛는데 혼란기 속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거래하는 신용본위로 부산 양품점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브로커로 이름을 알린다. 

 

▲ 1960년대 명동 로터리와 미도파 백화점 모습  © TIN뉴스

 

휴전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명동 미도파 백화점(현 롯데 영플라자) 건너편에 ‘수도양행’이라는 외래 양품점을 열었다. 양품브로커 경험 덕분에 보다 좋은 물건을 공급 받아 나날이 번창했다. 

 

또 동업자이자 부산에서 거래처 관계였던 아내와 결혼까지 하면서 나름 안정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국제시장에서 외래품 장사를 하던 아내는 섬세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이인표에게 장사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이후에도 재계 인사들보다는 문화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학계, 문화계 인사들과 오히려 친했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는데 바로 청년시절 꿈의 무대였던 연극에서 느꼈던 열정과 예술에 대한 향수였다.

 

결국 의미 있는 문화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친구와 함께 대동영화제작사를 차린다. 해방 이후 젊은 세대들의 세계를 작품화한 박화성 원작의 소설 “고개를 넘으면”을 영화로 제작해 1959년 개봉했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한다. 

 

▲ 이인표 회장이 활동한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 단원, 영화 ‘고개를 넘으면’ 포스터, 월간지 ‘모던다이제스트’ 표지  © TIN뉴스

 

영화제작은 단 한편으로 접어야 했지만 문화사업에 대한 관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잡지발행으로 새롭게 도전에 나선다. 

 

1922년 창간한 세계적인 잡지 ‘리더스다이제스트’의 한글판을 내려했지만 이미 판권계약이 되어있어 계획이 무산되자 1960년 11월 ‘모던다이제스트’라는 이름의 월간지를 발행한다. 홍보 부족과 만만치 않은 제작비에 지속적으로 적자를 내다가 결국 8호를 끝으로 폐간하게 된다. 

 

영화제작과 잡지발행 사업에 뛰어들면서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모두 탕진하게 되면서 열의만으로는 현실적인 문화사업을 성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실패를 안고 고민하던 시기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그해 8월부터 국산품 애용을 권장하며 모든 외래품 거래를 단속하고 중단시키면서 또 한 번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부산 국제시장부터 시작해 서울에 와서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외래품을 주로 취급하던 양품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사업 구상에 나섰고 고심 끝에 양품점에서 비교적 잘 팔렸던 미해군 단화처럼 편하고 멋진 국산 구두를 만들어 팔기로 결심했다. 

 

당시 PX를 통해 들어 온 미해군 단화는 최고급으로 인정받았는데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라 크기와 상관없이 나오는 즉시 팔려 재고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 한국전쟁 당시의 미해군 단화  © TIN뉴스

 

“미해군 단화보다 훨씬 편하고 멋진 국산 구두를 한번 만들어보자” 

 

구두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포부로 제화업을 선택했기에 이에 걸맞은 신선하면서도 근사한 상호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미국 남성잡지 ‘에스콰이아’에서 상호를 떠올렸는데 당시 대부분의 제화업체들이 우리말로 된 상호를 썼기에 ‘에스콰이아’는 낯설면서 한편으로 과감한 선택이었다.

 

주위의 우려와 달리 에스콰이아는 한번 기억하면 쉽게 잊히지 않는 장점에 상호에서 느껴지는 서구적인 분위기가 고급스런 이미지로 연결되면서 훗날 제화점이 급성장할 수 있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1961년 9월 21일 자본금 150만환으로 양품점을 수리해서 10여 평의 판매장, 15평의 공장, 9명의 직원, 3명의 판매원으로 ㈜에스콰이아를 설립하고 당시 유명했던 칠성제화에서 기술자를 데려왔다. 

 

구두는 160개에서 많게는 200개의 공정을 거쳐야 완성되는 섬세한 작업인데 편하고 멋진 최고급 국산 구두를 만들겠다는 굳건한 의지만 있었지 생산공정에 관한 지식 없이 사업을 시작했기에 제품 단가는 올라갔고 기술발전 또한 늦어졌다. 

 

구두의 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정을 배우는 것은 가장 어려우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결국 수백 켤레의 구두를 뜯어가며 쪼개어 분해, 해체하며 구두 만드는 법을 배웠다. 외국잡지에서 멋진 구두 사진을 발견하면 그대로 만들어내기 위해 몇날 며칠을 밤새워 연구하고 혼신을 다해 제작에 몰두했다. 

 

당시에 구두는 손님의 발사이즈를 재 공장에서 생산하는 주문생산 방식이었는데, 소비자에게 새 구두는 가죽이 딱딱하여 처음 신을 때 아픈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에스콰이아는 소비자에게 최고급의 구두를 생산 판매한다는 원칙을 추구했다. 가장 좋은 가죽을 사용하고 밑창은 고무창을 사용하여 편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등 철저한 품질관리에 들어갔다. 

 

또 구하기 힘든 순고무 밑창을 사용하고 구두밑창의 앞뒤코에 쇠를 박아 잘 닳아지지 않게 했으며, 박음질 한 땀 한 땀을 확대경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수한 품질의 구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신촌이나 명동에서 눈에 띄는 세련된 차림을 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에스콰이아 구두를 신고 있을 정도로 시장에서 반응도 뜨거웠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순방 길에 오를 때면 에스콰이아 구두와 가방을 사용했을 정도로 유명해졌고, 1965년에 국내 처음으로 구두상품권을 선보여 선풍을 일으켰다.

 

▲ 1950년대 서울 명동 거리의 여성들을 찍은 임응식의 사진. 마음산책 제공  © TIN뉴스

 

에스콰이아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오로지 예술작품 같은 구두를 만들어 고객들에게 보답하겠다는 포부도 더 커져갔다. 

 

1961년 ‘한국 최초의 구미식 구두’라는 내용으로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에 1단 8㎝ 정도의 에스콰이아제화점 개업 광고를 냈는데 광고 문안을 이인표가 직접 만들었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기울인 영화와 잡지사업이 비록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습득한 광고에 대한 감각은 큰 도움이 된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개인별 치수를 잰 후 공장에서 만드는 수제화 형태의 산업이었기 때문에 신문에 신발광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획기적이었다. 또 고객이 특히 선호한 신사화였던 미 해군 단화를 모델로 여러 크기의 기성화를 만들어 판매하는 소위 “Cash and Carry”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고객이 상점에 와서 모양이 마음에 들고 발에 맞는 구두를 진열대에서 골라 구매하는 등 고객의 입장에서 시작한 혁신적인 방식의 새로운 시도가 호응을 얻고 기대 이상의 광고 효과를 거두면서 주문이 쇄도하며 에스콰이아 제화점의 성장속도도 빨라졌다. 

 

또한 ‘한국 최초의 구미식 구두’라는 자부심은 에스콰이아의 독특한 멋을 이끌어낸 장인정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이인표가 지닌 뛰어난 예술적 감각은 1960년대 후반 국내 최초로 남성제화업자가 여성제화업으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핸드백 사업까지 진출하게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밀려드는 주문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었지만 다른 제화점과 차별화된 멋지고 편한 구두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제화기술자들에게 당시 인기가 좋았던 미해군단화 스타일의 제품을 요구했는데 이전에 배운 기술과 디자인을 고집하면서 마찰까지 일어났다. 

 

“최상의 제품을 위해서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우수한 제화기술자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다. 단 디자인만큼은 직접 간섭하겠다는 조건으로 미해군단화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훨씬 멋지고 편한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구두 디자인을 찾아 나섰다. 

 

이때 소공동 골목에서 구한 미국의 유명 구두회사의 카탈로그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낸 게 무늬가 새겨져 있는 구미식 구두였다. 당시 군화식 구두를 주력제품으로 판매하던 금강, 칠성, 신일 등 경쟁업체들과 비교해 국내 최초의 구미식 구두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제화업계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던 ‘브랜드 이미지’ 작업도 에스콰이아에 의해 선보였다. 웨스턴, 제네바, 보스턴, 알바니 등 구두마다 이름을 붙였고, 일년 후에 생산한 여성화에는 보다 여성스러운 이름들을 지어 붙였다. 등산화에는 마운틴, 에베레스트를 당시엔 희귀했던 골프화에는 그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자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좋은 가죽을 판별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정확한 지식이 없을 경우 믿음직한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판단해 일단 서울에 있던 3개의 원피공급회사 가운데서 가장 정직했던 일신피혁에 원피공급을 일임했다. 

 

또 초창기에 구두 밑창을 납품하는 하청업체의 기술 부족으로 추운 날씨에 구두굽과 창이 갈라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문제가 있는 구두를 구매한 고객들에게 연락해 모두 교환해 주는 사전조치를 취했다. 

 

▲ 1960~70년대 에스콰이아 신문광고  © TIN뉴스

 

애프터서비스 개념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시기에 하청업체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던 이때의 결정은 에스콰이아와 협력사 사이에 좀 더 성실하고 굳건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협력사들도 에스콰이아는 처음 인연을 맺기 어려워도 일단 협력사가 되면 신의를 져버리지 않는 기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디자인과 광고라는 두개의 축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한 에스콰이아는 눈에 뜨이도록 급성장을 이뤄냈다. 기술자 1명이 하루에 3켤레 정도를 만들던 상황에서 30여 켤레씩 주문이 밀려들었다. 

 

늘어난 주문에 맞춰 계속해서 기술자를 늘려갔지만 폭주하는 주문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수제방식이 아닌 기계로 구두를 생산해야 할 시기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계화를 도입한 대량생산체계로의 전환을 결심한다. 

 

먼저 그동안 관심을 두고 보았던 이탈리아, 독일 등 제화선진국의 최첨단의 제품과 시설 도입에 나선다. 1966년 원효로에 300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이탈리아에서 기계를 도입해 구두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5년 뒤인 1970년에는 성수동에 1200평의 부지를 매입해 우리나라 최초로 구두생산을 기계화한 공장을 짓고 제화선진국에서 탁월한 생산력을 가진 구두 생산기계를 들여오면서 에스콰이아는 본격적인 기계화 시대에 돌입, 일본을 비롯한 미국 등지에 에스콰이아 구두를 대량 수출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지면서 매장도 명동, 광화문 종로, 부산 등으로 늘려나갔으며, 매상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종업원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 

 

1978년에는 250만 켤레의 생산능력을 갖춘 성남 제2공장을 신축,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면서 에스콰이아는 국내 제화업계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가는 동시에 소매 제화점에서 완전한 기업으로 거듭나는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1977년에는 이태리 국제피혁제품 경진대회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제화업계에서는 최초로 판매 및 재고 현황 파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업무전산화도 추진했다. 1981년 9월 ㈜영에이지를 설립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제화업계 최초로 ‘1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 에스콰이아는 1981년 9월 ㈜영에이지를 설립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제화업계 최초로 ‘1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 TIN뉴스

  

“고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직원”

 

이인표에게 현장직원은 에스콰이아를 이끌어 온 주춧돌이었다. 일도 좋지만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지침에 따라 낮 기온이 섭씨 32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에는 공장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식사를 하더라도 관리자보다 생산직 사원이 먼저 하게 하는 등 가능하면 현장직원들의 편의와 입장을 우선 고려했다. 

 

또 판매직원들이 주말에도 일을 한다는 이유에서 임원들이 골프를 치지 않았다. 관리자와 매장 판매직원이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는 차원이었는데 오랜 기간 에스콰이아의 독특한 기업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객으로부터 신용을 얻기 위해서는 종업원들로부터 신뢰를 우선 얻어야 한다. 직원들이 건강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만 품질이 좋은 제품이 생산될 수 있다. 막대한 자본보다도 우수한 인재가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다.” 이는 창업 이래 흔들림 없는 이인표의 경영철학이다. 

 

또 직원들에게 안정된 일자리와 생활을 제공하는 일이 경영자의 첫번째 책임이라 믿어왔다. 어느 여름 장맛비에 성수동 공장이 침수되면서 가죽이 전부 물에 젖어 못쓰게 되자 직원들 스스로 얼마간 월급을 안 받고 일하겠다고 말한 일화에서는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정도 엿볼 수 있었다. 

 

아침 8시 출근 밤 10시 퇴근하던 생활을 일생동안 해오던 이인표는 사업을 시작한지 17년 되던 1978년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 56세에 과로로 쓰러진다. 이때 2개월을 병상에 누워 보내면서 인생에 대해 돌이켜보던 이인표는 사회사업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도서관은 물론 교회를 700여개나 지었고 일본의 마쓰시타는 120억엔을 들여 일본 정치 엘리트 산실인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했다. 민족이 번영하려면 많이 배워야 한다. 기업경영이든 국가경영이든 가장 투자가 우선되어야 할 부분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인표는 배움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하고 도서관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81년 3월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재단법인 이인표재단(에스콰이아사회과학재단)을 설립하고,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사회과학 문헌정보센터를 세워 보겠다는 뜻으로 1983년 종로구 사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도서관인 한국사회과학도서관(한국사회과학자료원)을 개관했다. 또 1995년에는 국내 대학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정보센터 설립 기금으로 사재 20억원을 기증했다. 

 

▲ 에스콰이아 창업주 이인표는 2002년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에 14개, 중국과 러시아 등 해외에 8개 등 모두 22개의 어린이 도서관을 설립하고 도서관 운영비로 매년 10억원 이상을 내놓았다.  © TIN뉴스

 

특히 “한국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무섭지 않다. 책을 안 읽는 국민인데 무엇이 겁나겠느냐?” 한 일본사람이 했다는 말과 우연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송상현 교수가 자택 차고에 동네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을 꾸민 것을 보면서 어린이도서관 사업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책 읽는 습관은 어릴 때부터 길러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국사회과학도서관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오른 1990년 어린이날 서울 상계동에 최초의 어린이 도서관 설립을 시작으로, 2002년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에 14개, 중국과 러시아 등 해외에 8개 등 모두 22개의 어린이 도서관을 설립하고 도서관 운영비로 매년 10억원 이상을 내놓았다. 

 

어린이도서관은 전부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 설립되었는데, 지역은 모두 이인표 회장이 직접 다니면서 선정했다. 이외에도 소년원 학생들의 학비조달과 산간벽지 학교에 어린이 신문잡지를 보내주며 국립도서관이 운영하는 이동도서관에 매달 300만원어치의 도서를 기증하는 사업까지 도맡았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한 인재들이 나중에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면 그만큼 국가에 유익한 결과가 될 겁니다. 결국 돈의 임자는 죽어도 돈은 죽지 않는 셈인데 그게 제 나름대로의 사회사업 철학”이라며 이인표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도시빈민아동을 대상으로 건전한 독서문화보급에 남은 여생을 바쳐 어린이들에게 ‘도서관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인표는 도서관사업 및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의 독서운동가(91년), 색동회상(92년), 옥관문화훈장(92년), 독서문화상(95년), 지식경영대상(99년) 등을 받았다. 특히 기업인들이 산업훈장을 수여받는 예는 많지만 문화훈장을 받은 것은 이인표가 처음이었다. 

 

2000년 1월 이인표는 “젊은 세대들의 변화와 감각이 필요한 시기에 나이 먹고 좋은 말들만 가까이 듣고 싶어 하는 경영자가 리더로 있는 기업이란 결국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에스콰이아의 미래를 위해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실질적인 경영에서 손을 뗀다. 

 

“손님이 신어서 편하고 가볍고 뒤탈이 없도록 하고, 또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항상 연구하라. 애프터서비스만큼은 만사 제쳐두고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인표는 에스콰이아라는 기업을 멋진 작품으로 만들고 이 작품을 통해 함께 사는 세상에 작은 것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인생을 사는 일, 예술가 같은 사업가를 꿈꿨다. 정성껏 물건을 만들고 잘 팔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일터를 이루고 그렇게 만들어진 에스콰이아 제품들이 고객들의 기억에 남아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생에 있어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1998년에는 경영혁신을 위한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사재인 시가 350억원 상당의 서울 명동 에스콰이아매장 부지를 회사에 무상증여했다. 이에 앞서 1997년 6월 IMF체제가 시작되기 전에 현금과 주식 244억원, 건물 70억원 등 총 314억원에 달하는 사재를 회사에 기탁했다.

 

▲ 에스콰이아 성수동 사옥, 2009년 야구선수 이승엽이 290여억원에 매입해 화제가 된 바 있다. © TIN뉴스

 

그럼에도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영난으로 2천2백명이나 되는 직원을 내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40년 가까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던 사무실에 발길을 끊고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다. 

 

“평생을 다 바쳐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기업이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탄탄한 내실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회사와 가족이 동시에 홍수에 떠내려가면 회사부터 건질 사람이라며 아내로부터 섭섭한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인표는 직원들의 안정된 직장과 생활을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자부심으로 삼아왔다. 

 

이인표에게 그때의 기억이 평생 잊지 못할 가슴 시린 회한으로 남았다. 별다른 예고 없이 생을 마감하기 이틀 전인 2002년 새해 첫날 장남인 이범(李范) 에스콰이아 회장의 세배를 받고 “직원과 협력업체를 먼저 생각하라”를 유언처럼 당부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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