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새로운 브랜드를 리뉴얼하면서 백화점, 쇼핑몰, 로드샵 등 유통분야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모두들 우리나라 패션업계가 계속 어렵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스러워 했다.

 

브랜드들은 온라인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대리점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도 정상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저조한 매출을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백화점은 예전에 보여주던 품격은 사라지고 거대한 행사장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세일을 하지 않으면 판매가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어이없는 이 말을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가 너무 안타깝기도 했지만 어느 백화점담당이 “현재 소비자는 브랜드 가치와 희소성이 있는 고가 제품이나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제품을 구매한다.”고 아주 명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웠다.

 

이런 단순 명료한 설명이 어정쩡한 국내 브랜드가 사라지고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SPA형 브랜드는 매출을 유지하는 이유다. 또한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브랜드는 세일을 해야만 판매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패션업계의 주요 업무는 크게 ‘영업분야’와 ‘디자인 생산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브랜드의 최고 결정권자는 대부분 영업파트의 수장이다. 오래전에는 디자인과 생산이 패션브랜드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영업파트에서 브랜드의 규모를 결정하고 MD가 디자인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브랜드의 정체성을 먼저 결정되고 어떻게 브랜드를 키워갈지 정하던 방식에서, 어떤 규모의 브랜드를 만들지 결정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브랜드는 매출과 수익이 최고 많은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매출과 수익이 최고인 브랜드의 디자인을 카피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생겼다.

 

사람의 생각은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이다. 수치로 결과를 보여주는 영업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고, 아름다운 형태로 가치를 표현하는 디자인은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치로 브랜드의 방향을 결정하려고 하면 매출과 이익이 최고치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목표일 수밖에 없다. 이때 브랜드의 정체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면 수치로 평가되는 매출과 이익은 차선이 된다.

 

우리나라 브랜드 대표나 책임자들은 “매출이 인격이다.” “매출이 브랜드 컨셉이다.”라는 식의 말을 쉽게 한다. 이런 주장에 디자인의 중요성이나 브랜드 컨셉은 고려되지 않는다.

 

매출을 목표로 열심히 만들고 팔면 매출도 커지고 이익이 생길 것 같지만 규모의 대결은 자본의 대결이고 결국 자회사보다 큰 자본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에 시장을 빼앗기게 된다. 그 대기업 또한 더 큰 해외 브랜드와의 규모 경쟁에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장만 빼앗기고 사라질 것이다.

  

브랜드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패션 브랜드의 정체성은 브랜드의 역사이며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의 기억이다.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아이템과 매장의 집기, 브로셔의 사진들이 브랜드의 정체성이다.

 

오랜만에 매장을 찾은 소비자가 자신이 기억하던 브랜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브랜드는 사라지고 평범한 제품들만 남은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브랜드가 다른 브랜드를 카피하고 계속 세일을 해야 팔리게 된 이유는 숫자 놀음에 브랜드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브랜드 정체성은 소비자군과 매출 규모를 결정한다. 작은 매출에 적합한 브랜드는 작은 매출에 맞는 조직을 구성하고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일하면 된다. 모든 브랜드가 엄청난 매출 규모를 가질 필요는 없다.

 

매출 목표를 위해 온통 행사장으로 바뀐 백화점에서 브랜드의 라벨을 보기 전에 브랜드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전에는 인테리어에 많은 투자를 해서 브랜드의 모호한 정체성을 보완했지만 지금은 수시로 바뀌는 백화점 MD로 인테리어에 투자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브랜드와 유통이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동안 소비자는 다양한 브랜드를 경험하면서 브랜드의 가치와 아이템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나라의 패션계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패션계는 브랜드와 유통이 서로를 탓하면 경쟁력을 잃어 가는 듯하다. 우리나라 패션 브랜드와 유통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을 고집하다 서서히 사라질 것 같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중에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혜택을 받은 세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원칙대로만 해도 충분히 세계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믿는 과거의 사람들이 진짜는 만들지 않고 돈 많이 벌었다는 다른 브랜드 흉내만 내다 이지경이 되었다. 우리의 새로운 세대가 이걸 배워 그대로 할까봐 너무 걱정된다.

 

그리고 이 돈타령의 근원지는 부동산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다. 내가 산 건물 옆으로 도로가 나서 건물 값이 오르기를 바라기보다 진짜 멋진 건물을 지어서 건물 자체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옳지 않나?

 

도로는 온 국민의 세금으로 만드는데 그것 때문에 건물 값이 오르면 그 돈은 국민과 나눠야 하지 않나? 못 생기고 불편한 아파트가 언젠가는 가격이 오르길 바라면서 건물 가치의 몇 배의 돈을 주고 사는 것보다 진짜 아름답고 편안한 건물을 갖고 싶어 해야 옳지 않나?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같다. 잘나가는 브랜드는 그 브랜드를 만든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것을 카피하지 말고 우리도 나름대로 가치 있는 브랜드를 만들면 된다. 브랜드 자체의 가치는 상관없이 브랜드가 얼마의 돈을 벌어 줄 것인지만 생각하니 진짜 아름답고 가치 있는 브랜드를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부자 나라가 되면 뭐하나, 문화를 주도하는 브랜드가 없으면 선진국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도로가 나서 건물 값이 올라가면 뭐하나 그냥 허접한 건물의 주인이 된 졸부인데… 설마 졸부가 긍정적인 단어인가? 모두 졸부를 원하는데 나만 눈치가 없는 건가?

 

심상보

피리엔콤마 대표

건국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겸임교수

(주)청향엔에프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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