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한성실업 창업주

심석(心石) 김용순(金容順)

1919~1995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순 © TIN뉴스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순은 경제개발 초창기 섬유산업을 일으키고, 섬유제품의 수출에 기여한 기업인이자 학교법인 심석학원(心石學園)을 설립하여 운영한 육영사업가다.

 

1919년 1월 12일 김헌수의 아들로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만주로 가는 길에 조약돌을 움켜쥐면서 어려운 일이 닥쳐도 굳은 맹서와 같이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아호(雅號)를 심석(心石)으로 짓는다.

 

서울중등공민실업학교 출신으로 1955년 한성실업주식회사(漢城實業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이탈리아에서 원사를 수입 공급하고 편직공장을 세워 원단을 생산했는데 견사와 실크제품을 주력으로 삼았다.

 

1956년 서울 답십리에 와이셔츠 생산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열악한 수출 환경에서도 미국에 수출신용장을 개설하여 국내 최초로 와이셔츠를 수출하며 섬유 수출시장 개척에 큰 기여를 한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고 내수 시장도 협소한 국내 상황에서 수출이 국가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확신하고 한국 상품의 인지도와 ‘한성’을 세계에 알린다는 생각으로 미국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 일본 현지 언론에서 한국 와이셔츠가 일본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대서특필하면서 별도의 광고를 하지 않고 손쉽게 일본 시장 진출에 성공한다.

 

▲ 김우중 성공신화의 배경이 된 동대문구 답십리에 위치한 한성실업 터  © TIN뉴스


한성실업은 1960년 한성섬유공업의 전신인 금화염직공업을 운영하는 등 사세확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1965년 한국메리야스수출조합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섬유 수출 확대를 위한 구심체를 운영한다.

 

1969년 트리코트 제품의 적자수출로 큰 타격을 받으면서 부채가 늘며 위기에 직면하자 회사업무에 전념하기 위해 조합 이사장에서 물러난다.

 

다음해인 1970년 공장 임직원들의 직위를 모조리 회수하고 일개종업원을 과장급으로 발탁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자신도 직접 직공들과 함께 철야작업에 나서는데 그 결과 생산량이 3배나 증가하며 동종업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다.

 

이때 “우리나라 경영인들이 모르는 점이 너무 많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경영합리화가 책상 앞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느꼈다”고 술회한다.

 

한성실업은 1970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하며 한성금속 등 여러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집단(그룹)으로 성장했다. 1973년 일본의 대규모 셔츠메이커인 대화(大和)셔츠와 합작으로 서울에 한화섬유를 설립하고, 1976년 일본에서 대형도매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오오니니의류와 합작해 자본금 1억원의 아동복전문생산업체 세부통상을 설립한다.

 

1973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 셔츠, 블라우스, 파자마 등 수출용봉제품을 생산하는 한성실업 새마을공장을 준공했는데 250명의 지역사회 인력을 고용, 농촌 소득증대에도 크게 기여했다.

 

▲ 1976년 12월 메리야스수출조합 이사장 당시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순 모습  © TIN뉴스

1976년 12월 메리야스수출조합 이사장 당시 의류수출조합(김만중), 직물수출조합(이은택), 쉐터수출조합(최준규), 면제품수출조합(김각중), 홀치기수출조합(여철연) 등 6개 섬유류수출조합을 망라한 한국섬유수출조합협의회를 발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된다.

 

협의회는 급변하는 국제무역정세에 대처하고 전 섬유수출업체의 단결을 위한 것으로 당시 미국은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정책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또 세계의 전반적인 경기도 뚜렷한 전망을 내리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선진국의 잇따른 수입규제 강화에 따른 다양한 대처가 필요했는데 “밖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안을 단단히 해야 한다”며 “경영자들은 고루한 고자세 경영 태도를 버리고 뛰면서 상황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면서 “다시 말하면 생산코스트를 낮춰 운영의 합리화를 철저히 기해나가야 될 것”이라며 내부적인 혁신에 힘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다.

 

 1973년 대한메리야스시험검사소 모습 © TIN뉴스

 

김용순은 재무부장관 고문, 증권협회 회장, 무역협회 부회장, 수출포장센터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및 감사, 대한메리야스시험검사소(한국의류시험연구원) 이사장, 건양대 설립이사 등을 역임하며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5월 증권파동이 일어난 이후 6월에 국일증권(현 KB증권)을 설립하고 증권협회 부회장을 맡아 증권파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증권시장을 회생시키고, 직접금융의 중요한 자본시장으로 육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1960년 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기업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체육 분야에 후원하는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데도 앞장섰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친인척들로 족벌경영 체제를 구축하기보다는 공개채용을 통해 들어와 성실하게 근무한 인재들을 주요 자리에 중용하는 인사제도를 정착시켜 당시 다른 기업집단들의 족벌경영에 경종을 울려주기도 하였다.

 

“인재를 중히 여겨라”는 김용순의 ‘인재 우선 원칙’은 한성실업이 우리나라 기업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사원들을 공개 채용하여 유능한 인재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아울러 장학생 제도를 두어 각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 양성에도 노력했는데 조카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연세대 재학시절 장학금을 지급해 졸업 후 한성실업에서 일하며 무역업을 익히게 했는데 훗날 김우중 신화 창조의 배경이 되었다.

 

▲ 대학 졸업 후 한성실업 재직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홍콩 출장 모습   © TIN뉴스

 

김우중은 한성실업에서 6년간 재직하며 세일즈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낸다. 1963년에는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켰는데 37만 달러의 계약은 당시 한성실업이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분량이라 다른 회사에 하청까지 줘야했다.

 

31세에 업무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순탄한 앞날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67년 독립해 대우실업을 설립하는데 한성실업에서 얻은 경험과 무역지식은 김우중이 대우그룹을 일구면서 한국의 수출왕으로 불리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우중은 이후 한성실업이 수출부진으로 자금난에 부딪치자 한성실업의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으며, 1994년 자동차부품제조로 업종을 전환하는데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용순 사후에는 심석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단 운영을 돕기도 했다.

 

심석학원은 한성실업이 기업 외부에서 활발하게 추진한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1973년 설립한 학교법인이다. 섬유업에서 얻은 이익을 교육에 환원하겠다는 큰 뜻 아래 생활필수품인 실(絲)처럼 이 세상에 꼭 있어야 될 사람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당시 김용순은 교육입국(敎育立國)이라는 기치 아래 첫째, 기술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둘째, 2세 양성이 부국강병의 길임을 깨달았으며 셋째, 지역사회에 공헌할 길은 교육 기관의 설립으로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 1972년 주민과 함께 심석실업학교를 건축하는 모습과 현재 심석고등학교 모습  © TIN뉴스

 

첫 시작은 1973년 경기도 남양주 마석 등지에 설립한 심석실업학교(심석중·고등학교)로 연간 150명의 방직 기능공을 양성, 자체소요 인력 확보를 통해 당시 정부가 권장하는 기술공 스카우트 방지에도 앞장섰다. 이후 초등학교(1987년)를 개교해 지금까지 28,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심석초등학교에 세워진 설립자인 한성실업 창업주 김용순 초대 심석학원 이사장의 동상 ©TIN뉴스

90년 이후 장남 김익중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며 기업활동의 현장에서 한발 물러난 이후 주변으로부터 “지나치게 짜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근검절약하면서도 전 재산을 재단에 희사할 정도로 육영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수출에서 육영사업까지 다양한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수출의날 대통령표창(1967), 석탑산업훈장(1972), 철탑산업훈장(1975)을 비롯해 산학협동 공로 대통령상(1973),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 국민훈장 석류장(1987)을 수훈했으며, 1995년 8월 2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김용순은 해방과 전란의 혼란 속에서 황량한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 경제주체로서 기업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경제개발의 원동력으로서 수출의 의지를 정립한 선구자적인 경영자이면서 우리나라 경제를 이끈 훌륭한 기업가다.

 

항상 실리보다는 명분을,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며 우리나라 무역업을 앞장서서 개척해왔으며, 특히 기업을 창업하고 성장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교육사업에 전념해 다른 많은 기업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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