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동성그룹 창업주

월천(月泉) 백제갑(白濟甲)

1927~1994

 

정심최선(正心最善)

“바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

 

▲ 동성그룹 창업주 월천 백제갑

화학소재 전문기업 동성그룹의 창업주 월천 백제갑 회장은 1927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신의주공고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1·4후퇴 때 피난, 1952년 부친 백성도 옹과 부산 동구 범일동에 가내공업 형태의 ‘건민고무’를 세우면서 신발산업과 연을 맺는다.

  

신발산업의 불모지였던 당시 국내 신발공장들은 신발용 접착제 대부분을 일본 수입에 의존했는데 신발 밑창이 쉽게 떨어지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때 장화에 덧칠하는 유성 에나멜을 만들던 백 회장이 국내 최초 신발용 접착제 개발에 나서면서 국산화에 성공한다. 

 

신발용 접착제가 큰 호응을 얻게 되자 백 회장은 1959년 9월 부산 진구 가야동에 3,300㎡ 규모의 ‘동성화학공업사’(현 ㈜동성화학)를 설립한다. 1966년 3월에는 수출 공산품 제조업체로 지정, 1967년 9월에는 주식회사로 법인 전환하여 ‘동성화학공업’으로 개칭한다.

 

▲ <사진 좌> 1960년대 동성화학 가야공장 모습 <사진 우>1959년 동성화학공업사 설립당시 사용하던 생산설비인 반응기 본사 사무동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출처 동성그룹)

  

이때 동성화학의 신발용 접착제가 수입품을 대체하면서 부산이 대한민국 신발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무엇보다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신발이 수출 효자 품목으로 부상한 것이 동성화학에게는 엄청난 호재로 작용했다. 

 

삼화고무, 국제상사 등 당시 부산에 기반을 둔 여러 신발업체들이 세계적인 규모로 급성장하면서 협력업체인 동성화학 역시 높은 성장세를 이어가게 된다. 그 결과 국내 신발용 접착제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자리 잡는다.

 

▲ 1975년 백제갑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에나멜 장화를 보여주면서 훌륭한 도료를 우리가 만들어 신발산업에 기여하고 있는데 원료를 전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관세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부산 방문 스케줄을 알게 된 백 회장이 경호원을 뚫고 들어가 즉석에서 면담을 신청, 국산 제품의 수출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관세제도 개편을 탄원해 관세 환급이라는 정부지원책을 실행시킨 일화는 업계에서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백 회장은 에나멜의 튼튼한 내구성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장화를 물어뜯어 보였다. 그러면서 에나멜 같은 훌륭한 도료를 만들어 신발산업에 기여하고 있는데 원료를 전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관세를 해결해야 외국과의 경쟁력이 생기지 않겠냐며 수출기업의 애로를 호소했다. 

 

동성화학의 또 다른 성장 배경에는 기술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를 꼽을 수 있다. 글로벌 기업과의 기술 제휴를 위해 1972년 8월 일본 사카이화학공업과 접착제 기술 제휴를, 같은 해 12월 일본 히로노화학공업과 특수 도료 에나멜 기술 제휴를 맺었다. 

 

1974년 4월에는 일본 하니화성과 합석 피혁용 표면 처리제 기술 제휴를 맺고 합성피혁용 수지·산업용 접착제 사업을 시작한다. 1983년 4월 일본 동양고무와 발포성 폴리우레탄 기술 제휴를, 1984년 3월 일본 히로노화학공업과 비변색 접착제 기술 제휴를 맺었다.

 

▲ 동성화학은 1985년 1983년 1천만불탑에 이어 2년만에 2천만불탑을 수상했다.(출처 동성그룹)

  

1981년 11월 1천만불 수출의 탑, 1983년 3월 조세의 날에 철탑산업훈장을 수훈했으며, 1985년 11월 2천만불 수출의 탑, 1986년 부산산업대상, 1988년 11월 5천만불 수출의 탑과 대통령 표창, 1991년 11월 1억불 수출의 탑을 각각 수상했다. 

 

국내 신발산업의 성장과 함께 사세를 확장한 동성화학은 1985년 12월 가야동 시대를 마감하고 현재 위치인 부산시 사하구 신평동 472번지로 본사를 이전하며 제2의 도약을 선언한다. 1988년 4월에는 신평동 370-116번지에 신평 공장을 설립했다.

 

▲ <사진 좌>1984년 건설중인 새둥지 신평공장 전경 <사진 우> 1985년 후반부터 시작된 사업장 이전이 1986년 6월에 완료되었다. 이전완료 기념식 장면.(출처 동성그룹)

  

1988년 현 동성그룹 회장인 백정호 회장을 중심으로 2세 경영체제가 출범,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며 태국,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 같은 선제적 대응은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신발산업이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이 됐다. 

 

1994년 ㈜동성화학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고분자 화학, 정밀화학, 석유화학, 복합소재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지금은 화학, 그린에너지, 바이오메디컬 3대 분야를 축으로 미래지향적인 그린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3년 기존 신발용 화학소재 사업을 더 발전시켜 흡음, 단열성과 난연성이 뛰어난 멜라민 폼을 국산화하면서 독일 바스프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상용화시켰다. 동성그룹은 2014년 매출 1조원을 달성했으며 이후에도 매출 1조원가량을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동성그룹은 4개 해외법인과 5개 계열사를 갖춘 그룹사로 발전했다. 지난해 친환경 에너지 사업 강화를 위해 모회사인 동성코퍼레이션과 자회사인 동성화학의 흡수합병 건을 결의해 2월말 임시 주주총회에서 합병 여부가 최종 결정될 전망이다.

 

▲ <사진 좌>1988년 제7회 팬텀오픈골프대회 남자부 우승자 이명하 프로를 시상하고 있다. <사진 우> 1987년 9월 10일 Roger Dunn Golf Shops 대표와 미국 시장 확대를 위한 업무협의 장면.(출처 동성그룹)

  

한편, 구력 20년에 핸디 10의 골프애호가였던 백 회장은 1984년 국내 최초 국산 골프공 ‘팬텀(FANTOM)’을 출시하며, 우리나라 골프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해외 유명업체의 하청이 아닌 독자 개발이라는 험난한 길을 택해 11년 만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또 동성화학은 직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처우·복지를 제공해 ‘부산의 삼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수익성과 생산성에 집착하기보다 구성원이 행복하고 개인의 삶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조직 전체의 성장도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는 백 회장의 철학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다 함께 가세” 백 회장은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두들겨주고 복지를 베풀어 직원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또 직원들을 일본으로 연수시키는 등 직원 스스로 회사를 위해 전력을 다 투구하게끔 만드는 매력도 백 회장에게는 있었다.

 

▲ <사진 좌>1976년 산업체 체험학습에 참여한 대학생들과 간담회 장면 <사진 우> 1987년 정월대보름에 개최한 새마을 경진대회에서 백제갑 회장이 직원들과 함께 윳놀이를 즐기고 있다. (출처 동성그룹)

  

“자네만 믿네” “함께 목욕이나 가겠나” “자녀 학비는 걱정하지 말게” “직원들 음식은 가장 맛있는 걸로 해줘야 하네” 직원들과 함께 꿈을 만들고자 따뜻한 경영인이자 동행자를 자처한 백 회장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직원들도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일했다고 한다. 

 

“결과에 좋고 나쁨에 연연하지 말아라.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노력했다는 그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라.” 백 회장은 오일쇼크로 유가가 치솟아 회사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정심최선’(正心最善, 바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을 되뇌었다. 

 

공자가 주역(周易)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첨부한 주석 중 하나인 문언전(文言傳)에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이 구절은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다’고 해석된다.

 

▲ <사진 좌>1981년 제16회 BBS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우> 1986년 제1회 월천청소년문예대상 시상식 

 

“사람이 기본이고 사람이 먼저다” 백 회장은 몸소 ‘적선지가 필유여경’을 실천하며기업의 가치와 행복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앞장서왔다. 1982년 불우 청소년을 지원하는 BBS 부산연맹회장, 1986년 ‘월천문예대상’을 제정해 2천여명이 넘는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건강한 청소년 문화를 조성하는 데에 힘써왔다.

  

무엇보다 한국경로의원 개원, 부산경찰청 청소년 선도위원 등 백 회장의 사회공헌은 형식적인 활동이 아니었다. 대기업 회장이라는 권위의식은 온데간데없고 수박을 전달하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먹는 백 회장의 소탈한 모습에서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진심이 담겨있었다. 

 

특히 80년대 초 트럭운전사로 재직하다 다치면서 직장을 잃은 한 남자가 폐렴 투병 중인 아내의 치료비를 위해 택시강도를 범행하다 미수범으로 잡히자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백 회장이 가정결연을 맺고 생계 뒷바라지를 약속, 출소 후 운전기사로 정식 채용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 오갈 데 없는 일가족 6명을 취업시켜주고 자신의 사택마저 내주는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직접 찾아가 마음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백 회장의 따뜻한 마음은 고향에서 빈손으로 월남, 공장직공을 전전하며 손가락마저 잘렸던 피맺힌 과거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 <사진 좌>1976년 전 직원들과 공장주변 도로청소를 하고 있는 백제갑 회장 <사진 우> 1984년 도시계획공청회에서 백제갑 회장이 제안한 부산도심 대중교통터미널 조감도 (출처 동성그룹)

  

한편, 백 회장의 부산에 대한 열정과 향토애는 누구보다 강했다. “부산은 교통을 정리 안 하고서는 절대 도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며 고가도로 건설과 낙동강 하구 유역 개발 등을 주장, 책까지 펴내며 설득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 제일 먼저 앞장섰다. 

 

“나만 잘 살면 뭐 하나 지역이 잘 살고 나라가 잘 살아야지” 배구의 불모지에서도 백 회장의 나라 사랑이 꽃을 피웠다. 1977년 배구협회 회장 취임 후 국위선양 실천으로 배구를 후원한 백 회장의 노력으로 1978년 로마 세계 월드컵 4위의 성적으로 빛을 발한다. 

 

백 회장은 1960년대부터 인하대 출신의 직원들과 인연으로 학교행사 때 다양한 지원을 했다. 1991년에는 5억원을 발전기금으로 쾌척하기도 했는데 2017년 개관한 인하대 60주년기념관 다목적홀 ‘월천홀’과 1층 로비 ‘월천 라운지’도 동성그룹의 기부로 조성됐다.

  

특히 기업인으로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과 지역사회를 위한 상생경영을 몸소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백 회장의 실천들은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기업인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 <사진 좌>창업주 월천 백제갑회의 동상 <사진 우> 1991년 11월 30일 제28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수상한 수출 1억불탑 (출처 동성그룹)

   

낡은 반응기 하나와 투박한 맨손이 전부였던 시작에서 수출 1억불까지 백 회장은 부산을 70~80년대 ‘신발 왕국’으로 만든 주역이다. 그가 설립한 동성화학은 접착제 기술 혁신에 성공해 한국 신발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정심최선의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 수입에 의존했던 신발용 접착제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하는 등 명실상부 우리나라 신발 산업의 맏형 역할을 해왔으며, 그 결과 동성그룹은 연구 개발에 대한 끈질긴 투자와 사업 다각화를 통해 지역 기업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2014년 3월 12일 설립 55주년을 맞아 부산시 신평동 동성화학 본사에서 열린 창업자 고 백제갑 회장 20주기 추도식에서 백정호 동성그룹 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시작이 없으면 발전도, 도전도, 극복도, 성취도 없는 것이기에 동성을 세우신 그 시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동성그룹이 2014년 창립 55주년을 맞아 진행한 故 백제갑 회장 20주기 추도식에서 백정호 동성그룹 회장이 부친을 기리며 올린 글이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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