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삼일방㈜·삼일방직㈜ 회장 

노희찬(盧喜燦)

1943~ 

 

▲ 삼일방㈜·삼일방직㈜ 노희찬 회장  

삼일방㈜·삼일방직㈜ 창업주 노희찬 회장은 1943년 12월 경북 영천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사회 통념상 장남에게만 주어졌던 대학 진학의 특권을 포기하고 1959년 실업계인 대구공업고등학교 방직과에 입학하며 창업의 꿈을 키운다.

 

학창시절에는 원사나 직물보다 염료, 화공, 조제 등의 기술이 복합된 염색가공에 관심을 더 가졌다. 대구공업고등학교 방직과 석차 1, 2등에게는 제일모직 특채 기회가 주어졌는데 제일모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회사로 섬유업계에서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전교 2등으로 졸업하면서 제일모직 입사가 확정됐지만 염색가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제일모직 대신 중견 방적회사인 내외방적 염색가공부에 지원해 공채 1기로 입사한다. 당시 내외방적은 최신식 독일 염색가공기를 수입해 염색가공공장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장 설립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대로 내외방적에 입사했지만 숙련 작업 같은 극히 제한적인 일만 주어졌다. 또 초봉이나 대우, 진급에서도 고졸에 대한 차별의 벽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대학에 가기로 결심하고 입사 다음해인 1963년 영남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한다.

 

그때 염색공장은 다른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1일 12시간씩 주·야 2교대 근무여서 야간 근무일 때는 오후 7시에 시작해 다음날 7시에 퇴근했다. 일과 학업의 병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회사에서 인정받고 신뢰를 쌓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휴학을 결정한다. 

 

업무가 숙련이 되면서 완벽한 일처리로 인정을 받게 되자 교대 시간 조정이 가능해져 원하던 학업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회사에서 학교까지 2시간 왕복거리를 오가는 주경야독의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 핑계로 주어진 업무를 게을리 할까봐 더 열심히 일했다. 

 

▲ <사진 좌> 노희찬 회장이 2007년 영남대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있다. <사진 우> 2018년 영남대에 문을 연 노희찬 강의실. 화학공학과 63학번 출신인 노희찬 회장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대학 발전기금과 후배 장학금을 포함해 총 6억7천여만 원을 기탁해 천마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선정됐다.  © TIN뉴스

 

남보다 먼저 출근해 작업을 준비했고 그 결과 가장 높은 생산성과 가장 낮은 불량률을 기록했다. 또 이때 새롭게 코팅직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관련 기술에 대한 자료를 공부하고 연구해 1964년 국내 최초로 특수 코팅가공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그 시기에는 우산이나 나일론에 특수 코팅가공 처리해 비를 맞아도 새지 않고 튕겨나가거나 우산을 접어서 털면 곧바로 털리는 제품이 인기를 끌었는데 시장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간 대략 1천만 개 정도의 수요가 예상됐다.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생산을 위해서는 일본에서 코팅가공기를 수입해야 했는데 가격이 미화 7만불 정도의 고가였다. 차선책으로 내외방적 사내 철공소에서 비슷한 기계를 만들어 일본에서 수입한 약재와 개발한 코팅가공법으로 코팅직물 생산을 시작한다.

 

당시 코팅직물은 국내에서는 비가 잦은 봄과 여름에 국한된 계절상품이라 처음부터 수출에 더 비중을 두고 추진했다. 기대와 달리 실부터 직조까지 시장에서 요구하는 품질을 충족시키기에는 국내 기술 수준이 따라가지 못했고 수출물량도 쉽게 확보되지 않았다.

 

결국 회사에서 코팅직물 생산 중단을 결정을 내리면서 적지 않은 실망감과 함께 섬유산업이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섬세한지 또 구석구석 많은 정성이 필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때의 코팅직물은 전화위복이 되어 훗날 성공의 길에 들어서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5년여를 보낸 내외방적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배려해 준 고마운 회사였다. 하지만 수출 라인을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개발한 코팅기술이 인정받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더 큰 꿈을 키워갈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판로를 찾아 코팅기술을 살리고 싶을 정도로 오로지 관심은 코팅뿐이었다. 마침 금강수지가공공업사에서 20%의 기술 지분으로 주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하자 이직을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코팅직물에 올인하게 된다.

 

 

▲ 삼일방㈜·삼일방직㈜ 노희찬 회장은 60년 섬유외길만 걸어오며 자수성가를 통해 국내 섬유산업 대표하는 기업을 이뤄낸 입지전적인 기업인으로 많은 후배 기업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 TIN뉴스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의 공장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왔기에 지분이 있는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면서 배우는 경험은 더 값지고 특별했다. “실패든 성공이든 내가 세운 뜻을 따라가는 한, 버려지는 경험은 없다”는 이때의 생각은 훗날 창업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코팅직물을 개발하고 수출할 방법을 찾느라 바쁘던 어느 날 규모가 작은 염색공장도 함께 운영하던 회사 사장이 폴리에스터 직물 축소가공기를 개발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때 당시 독일산 축소가공기 3대 정도가 서울에 있었을 뿐 대구에는 1대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대구경북 직물업체들은 50야드(1절) 정도의 샘플 직물을 들고 서울로 출장을 와야 했다. 축소가공을 한 결과물을 봐야 생산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일주일 이상을 숙박까지 하며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때 샘플은 맡긴 순서대로 적재되는데 수레를 미는 사람에게 뒷돈까지 주며 부탁할 정도로 시급했다. 불만에 찬 직물업체들의 목소리 속에서 “위기를 거꾸로 말하면 기회”라는 것을 절감하게 됐고 “문제는 해결하라고 존재한다”는 자신감에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우선 내외방적에서 군납용으로 100% 면을 납품하면서 축소가공 실험을 한 경험을 되살렸다. 면사와 달리 폴리에스터는 고온에서 삶으면 열을 받아 줄어드는 특성이 있었는데 이러한 원리를 이용한 드럼세탁기 형식의 축소가공기라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마침 대구 남일동에 세탁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남일철공소가 있어 1,000마가 들어가는 공업용 세탁기를 사정사정해서 제작을 맡겼다. 한 달 만에 기계를 받아 폴리에스터 가공사직물을 집어넣고 테스트한 결과 예상대로 완전하게 축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때 프레스로 찍어내면서 생긴 내부의 거친 면으로 흠집이 생길 수 있어 100마정도 들어가는 대형 세탁망 10개를 황포로 만드는 재기도 발휘한다. 여기에 백색형광제까지 첨가하니 수축은 당연하고 표백까지 완벽한 흠잡을 데 없는 원단이 탄생했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축소가공기(로터리워셔) 덕분에 대구경북 직물업체들은 더 이상 서울에 가지 않고 뒷돈까지 찔러주지 않아도 곧바로 축소가공을 할 수 있었다. 고충을 더는 것은 물론 비용까지 절감할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이 대구카톨릭대 관계자들에게 생산 공정과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TIN뉴스

 

작고 이름 없던 염색공장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마에 40원씩 일 2만마를 처리하게 되면서 큰돈을 벌게 되자 사장은 이번에는 고온고압염색기를 만들어 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축소가공기와 달리 염색기 제작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일반 염색과 달리 폴리에스터 염색은 130도 가까운 고온과 고압이 필요했다. 기계 제작에 있어서도 안정성이 필요한 복잡한 설비여서 고온고압염색기를 쓰려면 전부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서울에만 3대가 있었는데 독일산 기계 한대 가격이 약 천만 원이었다. 

 

당시 최고의 엔지니어로 인정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로 열악했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함부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마침 염색기를 보유한 염색공장에서 가공부장으로 일하는 친구 형의 도움으로 기계를 살펴볼 기회를 얻으면서 기본 스펙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토대로 일성기계 공장장 출신의 금성철공소 사장에게 제작을 의뢰해 1967년 10월 13일 새벽 3시에 대한민국 제1호 폴리에스터 고온고압염색기가 탄생하게 된다. 400만 원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갔는데 그때 100만원이면 대구 도심의 기와집 한 채 가격이었다. 

 

축소가공기에 이어 고온고압염색기까지 개발에 성공하면서 국내 폴리에스터 합섬업계에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덕분에 회사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염색공장은 자신이 주주로 있는 코팅공장과는 별개였기 때문에 아쉽지만 엔지니어로 인정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2015년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이 주시경 세관장에게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 TIN뉴스

 

이때쯤 대전에서 가장 큰 기업인 풍한산업에서 국내 최초로 광폭 103인치 직기를 수입해 광폭염색가공공장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중견사원도 함께 채용했는데 당시 풍한산업은 직원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일 정도로 지방대 졸업장으로는 입사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묘한 도전 의식과 함께 어렵게 얻은 대학 졸업장을 제대로 써먹을 기회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염색가공공장 건설을 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우려와 달리 풍부한 현장 경험과 성과를 당당히 인정받으면서 1970년부터 공장 건설을 맡게 된다.

 

그러던 중 효성그룹 산하의 동양나일론에 근무하던 친구로부터 최근 코팅의 시장성이 너무 좋다는 얘기와 함께 다시 해볼 것을 권유받게 된다. 코팅은 첫 직장이었던 내외방적에서도, 또 주주로 참여했던 금강수지가공공업사에서도 빛을 보지 못한 기술이었다. 

 

첫 직장부터 관심을 갖고 개발한 코팅직물이 큰 성과 없이 사장된 게 늘 아쉬웠던 상황에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 풍한산업을 그만두고 1972년 10월 대구 3공단 입구 근처의 150평 공장을 빌려 직접 제작한 코팅 기계 한 대로 삼일섬유가공공업사를 창업한다.

 

친구에게 300만원이라는 거금을 창업자금으로 빌려 어렵사리 공장을 마련하고 기계를 세팅한 뒤 처음 한 일은 인조모피 백코팅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친칠라 코트가 유행하면서 인조모피가 혼숫감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인조모피의 겉면은 레이온이나 데비론 같은 섬유를 사용해 물개 털처럼 보이는 효과를 냈지만 안쪽은 면사로 제직해 거칠고 외형이 지저분했다. 반면 모피 안쪽에 실버 코팅을 하면 깨끗하면서 털이 잘 안 빠지도록 견고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인조모피 거래업체 사장에게 실버 코팅을 제안하고 1마에 150원씩 코팅 가공료를 받았는데 한해 겨울 동안에 큰 수익을 거두게 된다. 자신감이 생기자 다음해 공장을 확장하고 1.5톤짜리 보일러와 염색기계를 들여놓고 삼일염직공업사로 사명을 바꾼다.

 

 

▲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진 가운데 뛰어난 코팅 기술력이 해외에서 인정받으며 주문 물량이 넘치게 되자 삼일염직은 생산라인을 새롭게 구축하며 본격적인 성장의 길을 걷는다.  © TIN뉴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왔지만 오일쇼크 직전에 동양나일론이 일본의 대형 유통기업인 다카시마야 그룹으로부터 주문받은 15만 야드의 자동차 덮개에 사용할 직물의 염색과 코팅을 삼일염직에 주문하면서 오히려 본격적인 도약의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효성그룹 산하에도 기계, 약재, 기술자를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만든 동양염공이 있었다. 그럼에도 주문을 의뢰한 것은 직접 만든 국산기계와 국내산 약재를 사용한 삼일염직의 기술력이 염색 코팅에 관해 경험이 많은 일본보다 앞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 수출한 코팅 원단이 일본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에도 신발, 텐트, 스키복 등 각종 섬유 제품 주문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생산설비가 부족해 주문 물량을 다 받을 수 없게 되자 1975년 9월 공장을 이전하고 월 150만 야드의 생산라인을 구축한다. 

 

1985년 삼일염직은 가공하지 않은 생지를 사서 염색가공을 한 뒤 유럽으로 수출했는데 이때 전체 제품의 70%를 서독으로 수출했다. 1987년 연평균 3,500만 불의 수출실적을 올리는 등 작은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축적된 노하우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반면 섬유산업의 장기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중견기업인 남선방직이 부실로 은행관리업체로 들어간다. 1985년 삼일염직이 인수를 검토할 당시에는 경쟁업체가 없었는데 1986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경기가 살아나면서 16개 업체가 남선방직 인수에 뛰어들었다.

 

인수를 위해 처음 은행에 갔을 때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하지만 최종인수자를 결정할 당시 은행이 제시한 조건에 부합된 곳은 삼일염직이 유일했다. 2년 전부터 남선방직에서 생지 생산량의 60%를 구매해온 게 정상화에 대한 자신감이자 인수배경으로 작용했다.

 

 

▲ <사진 좌> 1988년 연산 800만 야드의 직기 설비를 갖춘 삼일직물 대구공장 <사진 우> 1994년 삼일방직 6S 운동 결의 대회  © TIN뉴스

 

창업 15년만인 1987년 3월 남선물산이 자구책으로 매각한 남선방직과 남선직물, 보성섬유를 우여곡절 끝에 인수하면서 방직, 직물, 가공으로 계열화하여 섬유 일관 공정을 완성시켰다. 이후 남선방직은 삼일방직으로, 남선직물은 삼일직물로 각각 사명을 바꾼다. 

 

곧바로 구설비인 피카놀 북자동집기 704대와 준비시설 일체를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고 60개월 리스로 도요타 에어제트 직기 120대, 피카놀 에어제트 직기 63대, 파마텍스메피아 직기 32대 등을 신설했는데 직기 1대당 가격이 4만불에 육박했다. 

 

1990년대 들어 국내 인건비가 평균 20퍼센트 이상 오르면서 인건비가 큰 부담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섬유산업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국가적 관심이 줄어들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기 위한 기업들의 해외 이전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본격화됐다.

 

당시 베트남의 경우 장치산업인 면방산업에서 중요한 전기료가 40%, 인건비가 90% 저렴했다. 삼일방직 역시 해외 이전에 대한 고민을 한번쯤 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최첨단 자동 설비를 구축해 원가경쟁이 아닌 차별화된 전략으로 경쟁력을 키워 나갔다.

 

인건비와 전기료가 싸다고 해외로 공장을 옮기면 당장 몇 년은 재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뒤 상황이 바뀌거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는 쉽지가 않다. 한국산과 중국산의 품질 차이처럼 생산 코스트가 싼 만큼 판매 가격도 내려갈 수밖에 없다.

 

“뿌리가 깊지 않으면 바람에 견디지 못하듯 제조업도 국내 경쟁력이 없으면 해외에 가서도 순응하지 못한다” 해외로 옮긴다고 경쟁력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삼일방직은 지난 10여 년간 1,000억 원 이상의 설비투자를 국내에 과감히 단행했다.

 

▲ 2002년 세계 최초의 모달 전용공장인 삼일방직 제2공장 준공식  © TIN뉴스

 

특히 오스트리아 소재 렌징사가 생산하는 모달을 활용한 기능성 신소재 섬유에 눈을 돌려 2001년 국내 최초로 에어제트 방적사를 개발하고 이듬해 세계 최초의 모달 전용공장인 제2공장을 준공하고 2008년 마이크로모달, 프로모달 전용공장인 3공장도 가동했다. 

 

2012년 펜시얀 전용공장인 4공장을 준공했으며, 일반 생산라인의 10분의 1 규모인 파일럿 방적시설을 운영해 다품종 소량 생산을 통한 빠른 공급으로 본 라인과 상관없이 시장이 요구하는 다양한 제품을 신속하게 제작해 납기를 지키고 있다.

 

이외에도 친환경 생산을 하기 위해 태양광 에너지를 사용하고, 건평 2만여 평을 LED로 바꿔 연간 1000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절감시켰으며, 2019년에는 지속가능 친환경 인증인 GRS인증과 OCS인증을 취득하는 등 친환경 기업으로서의 입지도 다져가고 있다.

 

 

▲ 2017년 3월 20일 삼일방은 미국 아틀란타에서 미국 중견 방적기업인 뷸러퀄리티얀스의 지분 100%를 인수하는 주식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주(왼쪽부터) 마틴 캐기 허만 뷸러 CEO, 노현호 삼일방 대표이사 부사장, 마티 모란 뷸러퀄리티얀스 CEO, 노현석 삼일방 영업담당 상무이사  © TIN뉴스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로 미국 내 생산시설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2017년 3월에는 200년 역사의 스위스 기업 허만 뷸러의 미국 자회사 ‘뷸러 퀄리티 얀스’를 인수해 면방적 100년 역사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하며 국내 섬유기업의 위상도 드높였다.

 

미국산 원사를 사용한 의류의 경우 32%의 관세를 면제하고 있어 뷸러 퀄리티 얀스 인수로 관세 제약 없이 미국시장에 직접 진출하고 동시에 중미 6개국까지 공략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원사 50%는 자국에, 나머지는 중남미 시장에 판매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삼일방직은 부동산 가치상승이 아닌 순수 영업이익으로 지역 섬유업체를 대표하고 있으며 삼일염직 역시 20년 넘게 연속 흑자를 낼 정도로 재무구조도 튼튼하고 투명하며 30년 이상 노사분규 없는 모범적인 노사환경도 이끌고 있다. 

 

 

▲ 2012년 노희찬 회장이 윤상직 지경부 차관에게 삼일방직 설비와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TIN뉴스

 

창업주 노희찬 회장은 취미가 일이고 특기도 일이다. 스트레스도 일로 풀었다. 좋아하는 운동은 작업복을 입고 두세 차례 현장을 누비며 하루 1만2천보를 걷는 것으로 대신했다. 또한 새로운 옷을 보면 섬유의 물성이나 소재를 촉감을 통해 파악하고 싶어 본능적으로 손이 나갈 정도로 신소재 개발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또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회사에서 발생한 이익의 20%를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있으며, 2009년에는 삼일방 장학재단을 설립해 임직원 자녀 및 섬유 관련 지역 대학, 실업고 등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장학사업과 함께 사회공헌, 미래를 위한 친환경 소재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 제10회 서상돈상 수상자인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이 지역경제 및 문화진흥을 위해 서상돈상 상금 전액(2천만원)에 사재를 보탠 5천만원의 성금을 매일신문과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기탁했다.  © TIN뉴스

 

특히 지역 발전을 위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왔으며, 대구경제계를 대표해 대구시탁구협회 회장,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 시민구단 대구FC의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창단을 주도하고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도 이끌었다.

 

제11대, 12대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제17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제4대 대구염색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KOTITI시험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7년 100억불 수출의날을 시작으로 제39회 상공의날 금탑산업훈장 수훈 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사진 좌>2017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주최한 섬유업계 상생협력 간담회에 참석한 노희찬 삼일방직 회장 <사진 우>제27회 섬유의 날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노희찬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 TIN뉴스

 

또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주변에는 관대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단체를 우선시해 업계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상생과 협력을 통해 업계의 화합을 위해 앞장서며 대구경제는 물론 국가사회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노희찬 회장은 규모가 작은 기업은 작은 기업대로 큰 기업은 큰 기업대로 각 기업들이 갖고 있는 장점과 전문성을 한곳에 모아 시장을 키우는 실질적인 협업이 중요한 시기라며 상호가 윈윈하는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위기탈출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 제39회 상공의날에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삼일방직 노희찬 회장과 2017년 펴낸 자서전   © TIN뉴스

 

1972년에 설립 반세기 역사를 지닌 삼일방㈜·삼일방직㈜은 섬유의 기본이 되는 원사 생산에서 직물의 염색, 가공까지 메이드인코리아의 우수성을 알리며 대한민국 섬유패션산업 발전에 이바지해온 국내 대표 섬유기업이다.

 

특히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미래를 향한 뚝심으로 내린 노희찬 회장의 과감한 결단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아낌없는 설비 투자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경쟁력이자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술력이 되었다.

 

또한 삼일방직의 자랑인 에어제트방적기는 링방적기보다 생산량이 20배가량 뛰어난 혁신 방적설비로 랩핑하듯이 실을 생산해 잔털이 90% 이상 제거돼 옷의 형태 안정성이 뛰어나 드레스, 셔츠, 블라우스, 홈인테리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에어제트방적기로 생산된 삼일방직의 기능성 원사 브랜드 ‘에코실(ECOSIL)’은 현재 세계 16개국에 특허 출원과 상표를 등록해 판매 중에 있다. 에코실은 2008년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된 모달(Modal)방적사에 이어 2010년에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모달은 1세대 레이온을 뛰어 넘는 2세대 고습 강력 레이온의 일종으로 너도밤나무 펄프를 원료로 사용해 친환경적이며 면보다 통기성과 흡수성이 뛰어나다. 소비자가 옷을 입거나 세탁 후에도 형태 안정성이 우수하며 촉감은 실크와 비슷하다.

 

삼일방직의 모달 원사 생산량은 전 세계 18%를 차지하며 30년 가까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삼일방직에서 생산하는 원사 한 개의 무게는 2.52kg 길이는 약 128km로 하루 생산량 50톤을 길이로 환산하면 지구 둘레 4만km를 64번 돌 수 있다.

 

또한 2년 6개월 동안 국방부와 공동으로 연구해 타지 않고 녹지 않는 난연 소재를 개발해 전투복으로 공급하고 있다. 군복, 경찰특공대복, 소방복 및 전기회사, 철강회사 등에서 난연 직물이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산업현장의 안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삼일방직은 60여 가지의 천연원료와 합성원료를 가지고 5가지 복합원사로 브랜딩해 용도와 특성에 맞는 신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많은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용도로 개발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면방회사는 삼일방직이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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